배경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사회주의권의 급격한 변화는 북한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밖에서는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에서 개방·개혁 바람이 불어오고, 안으로는 자립경제가 흔들리는 체제위기 국면을 맞게 됨으로써 체제수호를 위한 대책 마련의 필요성이 시급히 대두되었다.

우리민족제일주의는 ‘우리식 사회주의?’를 더욱 정교화하여 북한이 사회주의 국가들과 전혀 다른 민족임을 내세워 그들 나라들로부터 불어오는 변화 외풍을 차단, 단절하고자 하는 체제수호 차원에서 출발하였다. 1985년 무렵부터 민족주의를 새롭게 정의하고 해설하는 논문이 대거 출판되었고, 1986년 7월에는 김정일이 당중앙위원회 책임간부들과의 담화에서 “주체사상 교양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통해 ‘우리민족제일주의’라는 용어가 공식 등장하였다. 1989년 9월에는 『우리민족제일주의론』이라는 단행본이 발행되기에 이르렀다. 김일성 사후에는 위대한 수령을 모신 조선민족이 제일임을 더욱 강조하면서 조선민족을 김일성민족으로 규정하고, 우리민족제일주의를 김씨 일가의 우상화 및 권력세습의 정당화, 체제수호에 활용하고 있다.

주요 내용

북한의 정권 수립은 소련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1960년대까지의 민족 개념 역시 경제생활, 심리상태, 언어, 영토 등의 공통성을 중요시한 계급과 경제 중심의 스탈린식 정의를 그대로 차용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은 자본주의 민족과 사회주의 민족을 구분하였고, 민족이 근대로부터 형성되었지만 전 세계의 공산주의 실현과 함께 소멸될 것으로 바라보았다. 항일무장투쟁을 권력의 정당성으로 삼았던 북한 정권에게 민족과 민족주의는 정권 수립 초기부터 상당한 자율성과 고유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내적 동력이었으나, 다른 사회주의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전후 복구 및 사회주의 체제건설 과정에서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성격을 담고 있는 사회주의적 애국주의? 담론을 적극 활용하였다.

수령중심의 유일적 지도체계가 수립된 1970년대는 북한식 민족 개념에 있어 과도기였다. 이때에도 스탈린적 민족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고는 있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민족 개념에 혈통을 추가하였고 언어의 공통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1960년대와 달리 민족의 형성이 근대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오래전에 국가의 형성과 함께 나타난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면서도 북한은 민족주의 자체를 부르주아적 민족주의로 폄하하면서 이를 부르주아의 계급적 이익을 전민족적 이익으로 가장하고 다른 민족을 멸시하는 배타주의로 간주하여 배격하였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 북한은 맑스주의적 민족 개념을 비판하면서 혈통과 언어를 중요시하고 경제생활과 심리상태를 제외시킨 북한식 민족 개념을 정식화하였다. 이는 민족 개념을 통일문제, 한반도문제로 확장시킨 것으로 북한이 제시한 통일방안 및 통일정책의 정당성을 강화하려는 측면이 있었다. 특히 1980년대 사회주의권의 변화에 대응 논리로 민족 개념을 변화시키고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한 우리민족제일주의를 제시하였다. 북한은 부르주아적 민족주의의 긍정적 측면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민족애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사회주의는 계급적 위업인 동시에 민족의 발전과 번영을 위한 위업”, “우리민족제일주의는 한마디로 말하여 혁명과 건설을 자주적으로 해 나가야 한다는 투철한 민족자주정신 … 민족제일주의 정신은 민족의식 발전의 최고형태”라며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동일시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는 민족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김정일의 말처럼 민족주의에 대한 전면적 동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한은 1990년대 들어서면서 계급문제에 대한 민족문제 우선의 원칙을 보다 강조하면서 “민족은 오늘날에 있어서 사회생활의 기본단위로 될 뿐 아니라 미래 공산주의 사회에 가서도 사회생활의 기본단위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며 민족소멸론 대신 민족영원론을 주장하였다. 또한 북한은 민족의 이익을 진정으로 옹호하는 ‘참다운 민족주의’와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사상적 도구로서의 부르주아적 민족주의는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북한은 부르주아적 민족주의와 ‘참다운 민족주의’를 구분하여 민족주의의 긍정성뿐만 아니라 그 발생의 진보성을 전면적으로 인정하였다. 민족주의가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자주적인 목적과 지향이라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고 그 기초에는 애국심이라는 최대공약수가 전제되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우리민족제일주의는 민족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징표가 무엇보다 핏줄과 언어의 공통성에 있다고 하여 이전의 계급론에 기초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적 개념 정의와 매우 다르다. 민족의 개념에 핏줄과 언어라는 요소를 부각시키는 반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배척한 데에는 무엇보다도 주변의 사회주의 국가들의 민족과는 핏줄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 이러한 북한의 우리민족제일주의는 우상화 논리로도 연결되고 있다. 『우리민족제일주의론』에서는 우리민족이 제일인 이유로 △김일성과 김정일이라는 지도자 △주체사상 △노동당의 혁명전통 △북한식 사회주의 제도 △우리 민족의 유구한 투쟁의 역사 등을 들고 있다. 한편, 북한은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부터 이러한 논리를 더욱 강조하면서 조선민족을 김일성민족으로 규정하고 있다. 북한은 2002년 신년 공동사설을 통해 ‘4대 제일주의’(우리 수령·우리 사상·우리 군대·우리 제도 제일주의)를 제시한 바 있으며, 김정은 집권 이후에도 우리민족제일주의를 지속적으로 강조해 오고 있다.

평가

우리민족제일주의는 다른 사회주의 개혁에 눈길을 돌리지 말며 북한 고유의 ‘우리식 사회주의?’ 노선을 따르도록 하는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민족제일주의는 여러 가지 정치적 목적 하에 북한식 사회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외부와의 차단을 합리화하는 통치담론으로 활용되었다.

북한이 다른 민족과 다르며, ‘제일’이라고 부각하는 것은 다름 아닌 김일성·김정일의 사상과 혁명전통이다. 이러한 논리는 김정은 정권에게도 계승되어 강조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민족제일주의라는 통치담론은 결국 최고지도자의 우상화 및 충성심 고취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민족제일주의라는 민족주의적 담론이 수령론?과 결합하여 헌법에서까지 ‘김일성민족’을 규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