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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지식사전

북한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주요용어를 그 유래와 의미를 사전방식으로 설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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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전투

연구개발과

2022-06-27 11:06:39.0

조회727

보천보전투?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 등 한반도에서 주로 활동하던 김일성이 국내에서 벌인 전투 중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 1937년 6월 4일 함경남도 보천보 지역(현 양강도)에서 경찰과 치른 전투이다. 보천보전투?는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국내에 알리고 광복 이후 북한 지역에서 김일성이 유력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부상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주요 내용

김일성이 항일유격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시기는 그가 19세였던 1931년 만주사변 발발 이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중국공산당은 만주성위원회에 항일유격대 창설을 지시했고,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도 항일유격대 건설에 참여했다. 당시 백두산 인근 안도현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김일성은 1934년 가을부터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에서 3단 정치위원을 맡았다. 김일성은 1936년 3월 결성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3사 사장이 되었으며, 당시 그가 지휘한 유격대 병력은 600명 정도였고, 이 가운데 절반 정도가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김일성이 이끄는 부대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로 개편됐고, 국경지대인 장백현 일대로 진출했다.

일제는 1936년 겨울부터 대규모 ‘토벌공세’를 감행했다. 김일성은 6사 사장 시절인 1937년 6월 4일 밤, 약 100명의 유격대 병력을 이끌고 함경남도 보천보 지역으로 진출해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고, 퇴각하던 중에 혜산에서 경찰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바로 이 전투를 북한에서는 ‘보천보전투?’라고 부른다. 전투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파장은 매우 컸는데,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무기정간에서 해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동아일보가 1937년 6월 5일 두 차례에 걸쳐 이 사건에 대한 호외를 발행했을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보천보전투? 이후에도 김일성과 그가 이끄는 부대는 일제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했다.

평가

보천보전투?로 대표되는 김일성의 항일유격투쟁 성과는 광복 이후 그가 귀국한 뒤 북한 지역에서 강력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올라서는 데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조선의용군 총사령 출신으로 당시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 중 한 명이었던 무정 등과의 경쟁에서 김일성이 승리하는 데 있어서 그의 항일유격투쟁 경험은 중요한 자산으로 작용했다. 특히, 당대 유명 작가였던 한설야는 1946년 김일성의 항일유격투쟁기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영웅 김일성 장군』을 출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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