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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지식사전

북한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주요용어를 그 유래와 의미를 사전방식으로 설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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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종파사건

연구개발과

2022-06-23

조회1,566

8월 종파사건?

8월 종파사건?’이란 북한 내 연안파와 소련파 계열 세력들이 1956년 8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개최를 계기로 김일성 중심의 정치세력을 당에서 축출하고자 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주도자들이 체포된 사건을 말한다. 김일성은 이 사건을 주동하였던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고, 당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1인 지배의 독재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배경

1950년대 북한은 내부적으로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북한 지도부 내의 권력투쟁은 전후 복구건설 노선과 사회주의 개조 문제를 둘러싼 논쟁을 벌이면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김일성 중심의 핵심지도부는 ‘중공업 우선의 경공업, 농업의 동시발전’과 농업협동화를 제시하였고, 최창익, 박창옥 등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들은 경공업과 농업 우선의 발전을 주장하면서 대립하였다.

당시 반대파는 연안파와 소련파 계열이었으며 권력의 핵심에서 점차 소외되어 가고 있었다. 초기의 연안파와 소련파의 반대 움직임은 북한 경제재건의 발전방향을 둘러싸고 김일성의 노선에 이의를 제기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스탈린 사후 개최된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의 스탈린 우상화 비판의 영향을 받아 김일성의 권력독점과 개인숭배 등을 비판하기 시작했으며, 점차 전면적인 반김일성운동의 성격을 띠기 시작하였다.

연안파와 소련파는 소련, 중국과 연계된 정치세력들로 소련의 스탈린 우상화 비판을 계기로 권력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섰지만 김일성 중심의 정치세력을 꺾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김일성은 반대파에 대해 소련의 지도노선을 추종하는 교조주의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으로 강하게 비판하면서 본인의 세력을 확대하고 반대파의 힘을 약화시켰다.

주요 내용

당시 반대파의 핵심은 연안파의 실세였던 최창익이었다. 당중앙위원회 상무위원이자 내각 부수상이었던 그는 당내에서 교조주의자로 낙인찍혀 있던 소련파 박창옥 부수상 등을 끌어들였다. 이들은 ‘집체영도의 강조와 개인숭배 반대’라는 ‘대의’를 내세우며 은밀하게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김일성이 정부대표단을 이끌고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을 방문한 1956년 6월 1일부터 7월 19일 사이에 반김일성운동을 본격화하였다.

1956년 8월 30일 김일성에 대한 반대파의 공개적인 도전이 평양예술극장에서 열린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이루어졌다. 원래 이 회의의 주요 의제는 사회주의 국가들을 방문하고 돌아온 정부대표단의 보고를 청취하고 인민보건사업의 개선방안을 토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회의 첫날 김일성의 사회주의 국가 방문보고가 끝난 뒤 토론에서 상업상 윤공흠은 첫 토론자로 나서서 의제와는 관계없이 김일성 지도부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중앙위원들은 김일성을 옹호하였고 반대파의 행위를 반당적 행위로 규정하고 나섰으며, 윤공흠은 곧장 단상에서 끌어내려졌다.

이후 8월 전원회의는 반대파의 움직임을 ‘반당종파행위’로 규정하고 “최창익, 윤공흠, 서휘, 리필규, 박창옥 등 동무들의 종파적 음모에 대하여”라는 결정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그들 중 윤공흠과 서휘, 리필규를 출당시켰으며 최창익과 박창옥의 당직과 내각 부수상직, 정부 직위를 박탈하였다. 이렇게 해서 반대파의 소요는 무마되었으나 사태는 마무리된 것이 아니었다.

이 사건이 모스크바와 베이징에 알려졌고 소련은 부수상 미코얀을, 중국은 국방부장 펑더화이를 급히 평양으로 파견해서 김일성으로 하여금 8월 전원회의의 결정을 번복하도록 종용하였다. 당시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던 김일성으로서는 이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김일성과 지도부는 소련과 중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1956년 9월 23일 9월 전원회의를 열어 8월 전원회의의 결정을 번복하였다. 이에 따라 최창익, 박창옥은 당중앙위원으로 복귀하였으며 윤공흠, 서휘, 리필규의 당적도 원상회복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세력이 약화된 연안파, 소련파 계열의 정치세력들을 ‘종파분자’로 몰아 숙청하면서 김일성의 권력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이 일련의 사건은 훗날 ‘8월 종파사건?’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평가

8월 종파사건?’이 북한 권력구조의 재편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당시 소련과 중국의 간섭으로 김일성 세력은 일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으나, 곧이어 대다수의 반대파들을 권력의 핵심에서 축출하였다. 이후 당은 종파 여독을 청산한다는 명분 아래 종파에 반대한다는 이른바 ‘반종파투쟁’을 대대적으로 전개했고, 주요 회의마다 해당 종파인사 또는 김일성을 비판하는 세력들을 숙청해왔다. 결국 김일성계 정치세력은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폭발한 반종파투쟁을 통해 북한 사회에서 김일성 비판세력을 거의 완전하게 소멸시키면서 명실상부한 김일성 중심의 유일지도체계를 확립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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