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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통이 현장스케치

통일리더캠프④ : 역사적 아픔과 엄숙함이 있는 곳 ‘뤼순감옥과 관동법원’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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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리더캠프④ : 역사적 아픔과 엄숙함이 있는 곳 ‘뤼순감옥과 관동법원’ 편

나눔선

해당 기사는 통일교육원의 공식 입장이 아닌 제10기 통일부 대학생기자단의 기사입니다.

안녕하세요 제10기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유니콘 이종현입니다! 저희 유니콘은 7월 10일부터 7월 15일까지 국외통일 리더 캠프를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종착지는 바로 중국의 랴오닝성 다롄시 뤼순커우인데요,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정학적 요충지이자 안중근 의사의 최후의 모습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뤼순은 중국 다롄시에서 42km 떨어져 있는 랴오둥반도 최남단에 있는 군항 도시입니다. 청나라 말기에 북양함대의 근거지였지만 1894년 청일전쟁 후 러시아가 조차하여 대 군항을 건설함으로써 러일전쟁 당시 중요한 전략적 쟁탈지가 되었습니다. 1905년 이후 일본의 해군기지로서 역할을 해오다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이 점령, 1955년에 와서야 중국에 반환되었습니다.

다롄과 뤼순은 42km 떨어져 있다 (출처=구글 어스)

△ 다롄과 뤼순은 42km 떨어져 있다 (출처=구글 어스)

특히 이곳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고 있는데요, 뤼순에 있는 뤼순 감옥은 1909년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수감되어 순국한 곳입니다. 안중근 의사뿐만 아니라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신채호 선생,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 또한 이곳에 수감되었다가 순국하였습니다.

신채호 선생은 1930년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뤼순감옥에서 복역한 지 6년 만에 순국했습니다. 선생은 뤼순감옥에서 뇌일혈로 숨졌으며, 죽은 뒤 화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사재를 털어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운동 근거지를 확보하려 다롄으로 가던 중 체포됐던 이회영 선생은 뤼순감옥에서 수감 중에 일제의 고문으로 순국했습니다.

뤼순 감옥 내부 (출처=이종현)

△ 뤼순 감옥 내부 (출처=이종현)

뤼순 감옥은 원래 1902년 뤼순을 점령한 러시아가 반항하는 중국인들을 억류하기 위해 지어졌습니다. 곧 이은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뤼순을 점령하고 1907년에 뤼순감옥은 총면적 약 26,000m2로, 275개의 감방에 2천 여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확장되었습니다. 뤼순을 소련으로부터 돌려받은 후 중국 정부는 뤼순 감옥을 항일운동의 주요 국가 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하면서 군사기밀 보호 등을 이유로 외국인의 방문을 불허해오다가 2009년부터 전면 개방했습니다.

뤼순 감옥 내부 (출처=이종현 기자)

△ 뤼순 감옥 내부 (출처=이종현 기자)

형무소는 담장으로 구역이 나뉘어 있는데, 담장 안에는 수색실, 고문실, 사형집행실, 15개의 공장 등이 있었고 담장 밖에는 강제노동소인 벽돌 공장과 과수원, 채마밭 등이 있었습니다. 건물의 외형은 3층 규모의 큰 대자형으로 방사형 구조를 보여주고 있는데 각 층마다 복도를 따라 감방이 나란히 나열되어 있으며 복도 중간 부분에는 간수들의 감시 및 투광, 상하층의 공기 소통을 하는 난간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뤼순 감옥에는 주로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등이 수감되었고, 1906년~1936년 사이 수감자는 연간 약 2만 명에 달했습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는 한국과 중국의 항일지사와 사상범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이곳에 수감하였고 온갖 고문을 자행했으며 수많은 수감자들이 형무소 안에서 처형당했습니다. 특히 1942년에서 1945년 8월 사이 약 700여 명의 수감자가 이곳에서 처형당했다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썼던 독방 (출처=이종현 기자)

△ 안중근 의사가 썼던 독방 (출처=이종현 기자)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독방은 본관 건물 서쪽 간수부장 당직실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독방 벽면에는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4개국어로 안내문이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쇠창살이 있는 유리창문 너머로 보이는 2평 남짓 한 방 안에 안 의사가 쓰던 서예 도구와 책상, 의자, 침구 등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안 의사는 이 방에서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를 완성하고 <동양평화론> 집필 작업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사형집행을 연기해달라는 청원을 무시한 일제가 집행을 앞당기면서 안타깝게도 <동양평화론>을 완성하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에 몸을 맡겨야 했습니다.

관동법원 정면 (출처=이종현 기자)

△ 관동법원 정면 (출처=이종현 기자)

뤼순감옥 인근에 있는 관동법원은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았던 법원으로, 뤼순 감옥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에 의해 세워졌지만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뤼순 점령으로 일본의 대표적인 식민통치 기관(법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이곳에서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6차에 걸쳐 재판을 받았습니다.

관동법원 2층 법정 (출처=이종현 기자)

△ 관동법원 2층 법정 (출처=이종현 기자)

현재 1층은 역사 전시관으로 개조되어 방문객들에게 이곳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2층은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았던 법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안중근 의사에 대한 영상을 10분가량 시청할 수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사형집행자 (출처=이종현 기자)

△ 안중근 의사의 사형집행자 (출처=이종현 기자)

안중근 의사 영정 앞에서 묵념하는 국외통일리더캠프 참가자 (출처=이종현 기자)

△ 안중근 의사 영정 앞에서 묵념하는 국외통일리더캠프 참가자 (출처=이종현 기자)

참고 자료
통일교육원, 국외통일리더캠프 자료집, 2018.
네이버 지식백과, 뤼순 감옥
연합뉴스, 中 뤼순감옥에 서린 안중근 의사의 숨결, 2016.8.14.

제10기 통일부 대학생기자단 유니콘 이종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

통일리더캠프3 백두산 금강대협곡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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