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6월 베이징에서 열린 대북 쌀 지원회담의 합의에 따라 씨아펙스호가 청진항으로 출발했다. 회담에서는 우리측 선박이 북측 항구에 입항시 파일럿 지점에서 모든 기를 내리기로 구두 합의했었는데, 이것이 현장에 전달이 안돼 북측이 인공기만 달도록 했다. 이 사실이 알려져 국민적 분노가 비등하였으며,북측의 사과로 일단락되기는 했지만 회담은 3차를 끝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1995년 6월 17일 베이징에서 열린 이른바 베이징 대북 쌀 지원회담의 합의에 따라 우리 정부는 6월 말 쌀 2천 톤을 실은 씨아펙스호를 북한의 하역항인 청진항으로 출발시켰다.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의 쌀이 북한에 제공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995년 대북 쌀 지원은 남측으로서는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으며, 북한은 심각해지는 식량난 속에서 남한으로부터 식량지원이 절실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쌀 지원 기간 동안에 여러 가지 부작용이 발생하였다.그 중 하나가 씨아펙스호가 인공기를 게양하고 하역을 하게 된 인공기 게양사건이다.
베이징 대북 쌀 지원 회담 당시 남과 북 쌍방은 우리 측 선박의 북한 항만 입항시의 요령에 대해서도 사전 합의를 했다. 즉 쌀을 실은 남측 선박이 북측 항구에 입항 시 파일럿 지점에서 모든 기를 내리기로 구두 합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합의는 현장에 전달되지 않았다. 쌀 2천 톤을 싣고 청진항에 입항한 씨아펙스호는 국제관례에 따라 태극기와 인공기를 달고 입항하려 했고, 북한은 태극기를 내리도록 해 결국 인공기만 올린채 하역 작업을 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우리 정부는 북한 측의 사과가 없으면 쌀 지원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며 강하게 항의했다. 이 사건은 북한 측이 일단 늦게나마 관련조치를 취하고 7월 중순 베이징에서 열린 제2차 쌀 지원 회담이 끝난 뒤 북측 회담 단장인 전금철이 직접 공식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함으로써 일단락되었지만, 베이징 쌀 지원 회담?은 같은 해 9월 26일 열린 제3차회담을 끝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인공기 게양사건? 외에, 쌀 수송선 삼선비너스호 선원의 억류사건, 안승운 목사 납북사건 등 북한의 도발적 행위가 꼬리를 물고 돌출하여 우리 국민을 분노케 하여 대북 불신감이 커지는 결과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