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월 21일 북한의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려 했던 사건이다. 특수훈련을 받고 남파된 북한의 무장 게릴라 31명이 국군복장을 하고 산악행군으로 청와대 인근에까지 이르렀으나, 우리 군·경이 불심 검문후 소탕작전에 나서자 북으로 도주하였다. 김신조 1명이 생포되고 28명은 사살되었다. 이들의 무차별 총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인명피해를 입었다.
1) 개요
1·21 사태는 1968년 1월 21일 발생한 북한의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려 했던 사건을 말한다. 그 날 밤 10시경 당시 북한의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 부대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시내로 들어오는 세검정 고개에 출현하였다. 특수훈련을 받은 북한 무장게릴라들은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군사분계선?을 넘었으며 국군복장에 수류탄,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채 야간 산악행군으로 자하문 초소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여기에서 경찰의 불심 검문을 받게 되자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난사하였으며,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타고 있던 많은 시민들을 죽거나 다치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우리 군·경이 현장에 긴급 출동하여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결국 무장게릴라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주하였고 합동수색작전 끝에 김신조 1명을 생포하고 28명을 사살하였다. 2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하여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그날밤 현장에서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이 무장공비의 총탄에 맞아 순직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북관계는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었으며, 향토예비군이 창설되고 학생 군사훈련이 실시되는 계기가 되었다. 김일성은 1972년 5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방북하였을 때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였다. 김일성은 자신도 모르게 좌경맹동분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일로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사건 주동자들을 모두 숙청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